4. 자유병동

그림처럼 그리 좋진 않지만 전에 말했던 외출을 자유롭게할 수 있는 그 병동이다. 현재 사람이 꽉차있는데 곧 나갈사람이 있다고 의사가 알려줬다. 6개월쯤 지났을 때였나 난 자유병동에 갈 수 있는 0순위 였다. 자유 병동에 배정을 받은날 친구들에게 인사를하고 짐을 챙기고 새로운 병실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방에 예전에 봤던 범수 형도 있었다. 그런데 뭔가 상태가 안좋아 보인다. 예전 밝던 모습이 안보이고 제스처들이 상대방을 기분나쁘게 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건강검진을 하러 병원에서 피뽑다가 잘못 뽑았는지 병원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들었다. 그런일을 겪고나서 긍정적으로 보이던 사람이 한순간에 바뀔줄은 몰랐다. 그리고 전에는 담배로 고생했었는데 이젠 담배도 하루 몇개씩 제한된 량만 제공하고 내방에 있는 한명의 환자만 담배를 핀다. 자유병동에 오니 형이 추가로 믹스커피도 보내주고 두유 멸균우유도 보내주었다. 여기는 2시가 간식시간이다. 난 매일마다 두유와 멸균우유를 마시곤 했다.

외부병동 병실사람들

우선 입구에보면 눈에 띄는 간호사가 있다. 남자간호사. 이병원에 유일한 남자간호사다. 이것저것 다 챙겨준다. 그리고 환자들의 상태를 보자면 확실히 폐쇄 병실보단 상태가 나은 사람들이 많다. 내방의 환자들은 5명인데 확실히 예전 매트리스보단 덜 딱딱했다. 이 점이 정말 좋았다. 범수형 그리고 10시만되면 매점이 열어서 콜라와 포카칩을 사들고 나눠주는 형 이 있었다. 1.2리터 팹시콜라가 3천원이나 한다. 어마무시한 가격인데 이 형덕분에 콜라를 맘껏 마시곤 했다. 덕분에 병원에 있는 1년 2개월동안 내 뱃살의 변화가 많이 있었다. 엄청 나왔다. 한 5kg는 쩠다. 그러고 나머지 같은 병실환자는 안타갑게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보호사는 밤에 약먹을 시간에 간호사와 같이오고 아침 새벽에 잠깐 방문한다. 그리고 병동이 남자는 1,2층 여자는 3층이다. 여자 환자들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 잘가는게 사회복지사 선생과 보내는 시간이다.

노래방 99점

수요일은 노래방 시간이다. 한시간 가량 20명이되는 사람들이 한곡 씩 노래를 부른다. 나는 주로 나얼 노래를 불렀었는데 이날따라 김범수의 보고싶다가 떠올랐다. 나는 불렀다. 보고싶다. 보고싶다. 고음은 올라가긴하는데 그리 좋은 목소리는 아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점수판을 보니 99점이었다. 아쉽다 1점이 아쉽다. 100점을 받으면 미니간식을 얻을 수 있었는데 아까웠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시는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이뻤다.

신경섭 목사님

월요일에 서울을 가시고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정신병원에 환자를 챙기시는 정말 열정적인 목사님이시다. 매일 11시에 밥먹기 전까지 성경낭독을 돌아가면서 하면서 설교를 해주신다. 참여자는 6,7명 정도 나도 참여했지만 나중엔 화가 나서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일요일에는 외부병동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 찬양하고 성경말씀, 설교를 듣는다. 코로나에서 조금 풀린 시기라 그런지 다같이 모여 설교를 들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면 폐쇄 병동사람들을 위해 마이크 예배를 드리러 가신다.

산책

산책이라해봐야 별거없다. 그냥 크게 동그랗게 병원 주변을 도는 것이다. 크기는 제법있어서 걸을만 하다. 예전에 축구를 했었는지 버려진 축구골대가 보이는 곳이다. 돌다보면 매점도보인다. 산책에는 제한이 있다. 밖으로 나가지 말 것. 나가면 cctv로 보고있는 간호사가 긴급하게 차타고 잡아와 독방에 하루 가둔다. 내가 그럴뻔했다. 그런데 병원의 끄트머리 쪽을 보면 사람들이 제법 보인다. 정상적인사람들로 보이는데 정신병원에 외부사람이 있는게 신기했다. 목사님에게 물어보니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인 사람들이라한다.

꼬리뼈

꼬리뼈가 너무아프다 생활하기 곤란한 지경일정도로 아프다. 똑바로 누워잘 수가 없어서 옆으로 잠을 청하곤 했다. 폐쇄 병원에있었던 딱딱한 매트리스 때문이었다. 간호사에게 말한 후 바깥 병원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의사에게 증상을 말하고 난 주사를 맞았다. 그런데 돌아와도 나아지질 않는다. 다음주에 또 갔다. 이번엔 의사에게 근본적인 치료를 할 수 없느냐는 말에 똑같은 치료를 해줄 뿐이다. 엑스레이엔 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너무 아프다. 두달이 지나고 나서야 내 꼬리뼈는 차츰 나아졌다. 바깥 병원을 갈 수 있어서 나는 치과에 가 충치 치료를 하기도 했다.

핸드폰

자유병동에서는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다. 예전처럼 전화카드를 쓰는게 아닌 정말 핸드폰을 쓸 수 있었다. 전화통화도 맘대로 하고 게임도 많이하기도했다. 제한된 데이터로 게임을 하곤 했는데 데이터가 너무 턱없이 부족한게 아쉬웠다. 무한제 데이터 요즘제로 변경하자니 부모님 부담이 너무 컸다. 이동통신사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주로 했던 게임은 좋은피자 위대한 피자 이다. 피자만드는게 정말 재미있었다. 따로 캐쉬템 지를필요없이 편안하게 피자 만들기를 했다. 두번 째로 즐긴 게임은 벽돌깨기 퀘스트 이다. 각도를 잘 제어서 많은공이 많은 벽돌을 부시는 게임이다. 그렇게 게임만 하다보니 병동에 가만히 있는게 지루하기 일쑤였다.

변비

조현병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변비가 꽤나 심해젔다. 기억해보니 2번째 입원을 할때에 15일간 변을 못싸서 하필 국수 특식이 나온날에 변을 힘겹게 보고난 일이 생각났다. 당시엔 변비약을 먹지 않았었는데 이번엔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간호사에게 얘기 했다.

내 추가 처방은 아침 저녁에 마그밀을 먹기이다. 변을 부드럽게 해주는 약이란다. 그리고 저녁에 아기오란 약을 처방받았다. 식이섬유가 많이 함유되어 변을 잘 만들어주는 약이라 한다. 약을 먹기 시작하고 나서는 거의 매일 같이 물똥이나 길쭉한게 나와 장이 편안했다.

하루일과

내 주로 하루일과는 아침먹고 자고 점심먹고 프로그램가고 낮에 하루온종일 데이터가 달지 않는 게임만 주구장창하고 저녁먹고 한동안 못봤던 예능방송을 몰아보곤 했다. 당시 tv에는 btv가 깔려있어서 못봤던 예능방송을 볼 수 있었다. 런닝맨, 불후의 명곡, 복면가왕을 주로 봤다. 이상하게 핸드폰이 있으니 가족과 전화하는 횟수가 오히려 줄어들었다. 하루는 폐쇄병동 입구에 앉아있었는데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은걸 보았다. 이걸다 읽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하는 생각에 한권씩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된 책은 그냥 넘겨버리고 최근 책들을 읽었다. 그것도 2000년대 책들이다. 한권 씩 빌려가면서 읽어나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만화로 된 삼국지였다. 50여권이나 됐던걸로 기억하는데 이건 특별히 하루에 5권이나 빌려주시면서 보호사가 가저가 읽으라하셨다. 나는 시간가는 줄 몰랐다.

퇴원

그렇게 다시 가을이 끝나가고 2023년 11월 1일 엄마가 퇴원 준비를 하란다. 내 병이 어느정도 나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나도 상태가 좋아젔다고 느꼈다. 11월 3일 형이 차를 끌고 엄마와 아빠가 찾아왔다. 나는 수많은 책들과 옷보따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엄마가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맞이했다. 아는 그냥 멍하게 포옹했다. 엄마는 내모습이 좀 굳어보인다고 했다. 얼굴표정과 몸이 굳어있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약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마무리 인사를 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온 집

집으로 돌아오니 집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아빠는 내방에 벽걸이 에어컨과 킹사이즈 침대를 사주셨다. 오랜만에 온집이라 그런지 낮설게 느껴진다. 나는 엄마에게 확답을 했다. 약을 잘먹겠다고 그리고 다신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첫째 할 일은 직업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사회생활을 그리 오래한것도 아니고 직업을 안 구하고 산지 10년이 가깝다. 직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한 동안 게임을 하거나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태조왕건 야인시대 같은 고전 명작을 즐겨찾아보기 시작했다.

주식

지금생각해보면 이걸 건드리지 말았어야했다. 내가 모아놓은 돈이 얼마 되지도 않고 엄마가 주는 돈으로 주식을 손댔다. 하는족족 한국장이나 미장이나 마이너스 치기 일쑤였다. 나는 2024년부터 2025년 중반까지 엄마돈 1억을 날려먹었다. 엄청나게 큰돈을 조금씩 야금야금 갉아 먹었다.

장애인 등록

도저히 이렇게 살 수는 없어서 나는 충북기독병원의 통원치료를 받으며 대빵 간호사에게 상담을 받았다. 간호사는 장애인 등록을 하라고 하고 장애인 공단을 통해 취업을 알선 받으라고 얘기를 들었다. 나는 장애인 등록을 했더니 2달 뒤쯤인가 경증 장애인 진단을 받게 되었다.

통원치료

나는 약을 꾸준히 먹어야 했기 때문에 한달에 한번씩 병원에 찾아가야 했다. 형이 초기에는 운전해줘서 충북기독병원에 같이 가주었지만 나중엔 바빠서 내가 운전해 가기도 했다. 그러다 의사 말이 환자가 가득차서 나처럼 통원치료 오는 환자를 추가로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했다. 법적으로 의사가 볼 수 있는 환자수가 제한되어있는데 나까지 받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서울대 병원으로 갈까 싶기도 했지만 가까운 진천읍에 정신건강의학과가 있어서 여길 방문하기로 했다. 환자가 정말 많다. 나는 처음오는 환자라 그런지 대기시간이 2시간이나 걸리고 나서야 의사를 볼 수 있었다. 몇가지 간단한 질문을 하고난뒤 내가 조현병 장애인인걸 알고는 약값을 할인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조현병환자는 나라에서 약값을 조금 부담해주는 제도가 있다고 알려줬다. 충북기독병원보단 한 40%는 감면 받은 듯 하다. 약도 바뀌었다. 두알짜리로 먹어야 했던 약이 반쪽 연두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어보니 기존에 먹던 두알의 역할을 하는 반쪽짜리 약이라 한다.

취업

장애인 공단에 전화를 걸었다. 한 아저씨가 받는다. 난 이 아저씨가 소개해준 첫 직장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보건증이 필요하다고 해서 발급받기도하였다. 액상 커피를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다가오는 커피 팩을 받아 뒤집어 놓는 작업이었다. 나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15일만에 그만뒀다. 여자도 하는 일이라고하는데 나는 도저히 버티질 못했다.

공단아저씨가 장애인 취업성공패키지라는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다. 첫기념에 20만원인가 받았고 3개월근무하면 30만원 6개월근무하면 40만원 12개월 근무하면 50만원인가 받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청주에 내려가 이걸 신청했다. 조건은 회사가 4대보험에 해당하는 회사여야 했다. 장애인 취업 알선해주는 곳도 대부분 4대보험에 드는 회사라 알려주었다.

한달뒤 두번째 취험할 자리를 소개해 주었다. 일은 하루에 4시간 일하는 것이다. 점심따윈 없었다. 다른 장애인 아저씨 아줌마 한명씩 같이 취업하게되었다. 아저씨는 어디 사장자리 하다가 8시간 일하는게 싫어서 4시간 근무하는 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이 아저씨는 왼손에 약지와 새끼 손가락이 없었다. 사고로 짤리게 됬다고 알려주었다. 여사님은 허리가 구부정 해 키가 작으셨다. 이분들과 마스크 팩 만드는 공장에 취업했다. 한달 월급은 4대보험을 빼면 90만원 수준이었다.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할만한 일이어서 계속 다녔다. 그런대 회사 대표가 월급을 15일 20일 동안 주질 않는다. 자꾸 미뤄서 준다. 이 일 때문에 다른 공장 아주머니들이 월급도 주지 않는 공장에서 더 일할 이유가 없다며 나가버렸다.5개월째였다. 카톡에서 이상한 문자를 받았는데 회사대표가 국민연금을 납부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카톡이었다. 아저씨도 진작에 그만두었고 여사님은 계속 다니고 있던 상황이었다. 나도 이사실을 공단에 알리고 6개월 채우고 그만두웠다. 2개월쯤 쉬는동안 나는 알바몬 알바천국등 알바자리를 구하려고 노력했다. 공단에서 연락이 잘 안오던 시기였다.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 일자리가 없다고 했다. 이런 저런곳에서 취업 제안이 들어와 이력서를 들고 가보았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택배일을 하는 고수익 직업도 구해보려했는데 조현병환자는 안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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